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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정가 옆의 빨간 줄, 누구를 위한 숫자일까

앵커링 효과, 처음 본 숫자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심리

발행

쌓아 둔 니트 위 가격표에 300,000을 지우고 150,000이라고 적혀 있다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는 처음 본 숫자가 기준점이 되어, 이후의 판단이 그 숫자 쪽으로 끌려가는 현상입니다. 과학 학술지 Science에 실린 트버스키와 카너먼의 1974년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무작위 숫자에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기준점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지갑을 지키는 데 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을 세일 시즌입니다. 옷 가게에 들어서면 가격표마다 정가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아래 할인가가 큼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정가 30만 원, 할인가 15만 원. 계산대에 가기도 전에 15만 원을 번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그 30만 원은 정말 믿을 만한 기준일까요? 오늘은 빨간 줄 위의 숫자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앵커링 효과란 무엇일까

처음 본 숫자에 생각이 닻처럼 묶이는 현상입니다. 앵커(anchor)는 배를 한자리에 붙잡아 두는 닻을 뜻합니다.

사람은 처음 본 숫자에서 출발해 조금씩 고쳐 가며 답을 찾습니다. 문제는 고치는 폭이 대개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최종 답이 출발점 근처에 머뭅니다. 중고 거래에서 판매자가 먼저 적어 둔 가격, 회의에서 처음 나온 예산안이 이후 대화의 기준선이 되는 것도 비슷한 장면입니다.

누가 실험으로 보여 줬을까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이 1974년 논문으로 널리 알렸습니다. 이 논문에는 '행운의 바퀴' 실험이 나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 앞에서 0부터 100까지 적힌 바퀴를 돌렸습니다. 바퀴는 10 또는 65에서 멈추도록 조작되어 있었습니다. 참가자는 먼저 "UN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이 이 숫자보다 높은가, 낮은가"에 답했습니다. 그다음 실제 비율을 추정했습니다.

결과는 뚜렷했습니다. 10을 본 집단의 추정치 중앙값은 25%였습니다. 65를 본 집단은 45%였습니다. 바퀴의 숫자가 질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참가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맞히면 보상을 주는 조건에서도 효과는 줄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도, 잘하고 싶어도 닻은 여전히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세일 가격표의 정가도 앵커일까

네, 대표적인 앵커입니다. 정가 30만 원을 먼저 본 사람에게 할인가 15만 원은 싸게 느껴집니다. 정가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같은 15만 원이 그냥 15만 원입니다.

그래서 부풀린 정가는 규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 연방규정집(eCFR)에 따르면, 상당 기간 실제로 공개 판매하지 않은 가격을 '이전 가격'으로 내세우는 것은 기만적인 가격 비교로 봅니다.

협상에서는 먼저 부르는 쪽이 유리할까

대체로 그렇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에 소개된 연구에 따르면, 구매자든 판매자든 첫 제안을 한 쪽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첫 제안은 최종 합의 가격을 강하게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기 목표 가격이나 먼저 제안한 쪽의 대안에 집중하자 이 이점은 사라졌습니다. 연봉 협상 자리에서 회사가 먼저 숫자를 꺼냈다면, 그 숫자보다 내가 정해 둔 목표를 다시 떠올리는 편이 좋습니다. 앵커는 '절대 규칙'이라기보다 '기울어진 출발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세일 시즌에 바로 쓰는 법

  • 내 기준을 먼저 세우기 —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 물건에 최대 얼마까지 낼 수 있는가"를 메모해 둡니다. 내 숫자가 먼저 있으면 정가가 덜 끌어당깁니다.
  • 정가 대신 실제 거래 가격과 비교하기 — 할인율보다 다른 판매처의 현재 가격, 지난 세일 때 가격을 확인합니다. 비교 대상을 바꾸면 앵커도 바뀝니다.
  • '얼마 아꼈나'가 아니라 '얼마 쓰나'로 다시 읽기 — "50% 할인"을 "15만 원 지출"로 바꿔 말해 봅니다. 그 금액이 원래 계획에 있던 지출인지 한 번 더 묻게 됩니다.

마치며

가을 세일이 한창인 요즘, 빨간 줄이 그어진 정가를 보면 잠깐 멈춰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숫자는 내 기준이 아니라 매장이 건넨 닻일 수 있습니다. 내 숫자를 먼저 쥐고 들어가면, 세일은 훨씬 즐거운 쇼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